분꽃
박경옥
우리가 헤어지던 날은
깜두라지 열매가 익어가고 있을 때
밭둑으로 빗방울 조금 일렁였고
마른 갈대 조금 깊어졌고
은행나무 그늘 풀 섶에 몸을 풀고
노랗게 흘러가고 있었지
아직 덜 여문 우리의 연애는 그렇게
가을 속으로 떠나갔지
나는 간혹 너를 못 잊고 때때로 잊기도 하면서
오래오래 저물녘을 생각 했지
밤이면 휘몰아치던 열망에 대해
중독된 향기에 대해
미완의 사랑에 과대포장은 금물이라고 위안을 했지
낡고 헐렁한 날이 깜두라지 빈 꼬투리로 떨어지고
액자 속 우리의 안부가 옛날을 더듬고 있는 사이
어느 교회당 모퉁이에 한 무더기 분꽃이 피고 있었지
오후 4시에 문을 여는 꽃방, 기다림으로 흥건해진
까만 씨방이 흰 속살을 품고 여물어가고 있었지
생의 가장 극적인 순간은
이렇게 문득 다시 만난다는 것
분꽃처럼 저녁을 향해 꽃잎을 열고
뜨거운 심장 세울 수 있다는 것
박경옥 1956년 전북 군산 출생, 계간<문파>등단, 한국카톨릭문인회, 수원문인협회회원, 동남문학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한국문인협회 60년사 편찬위원, 계간 '문파' 편집위원, 수필집 '발자국마다 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