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형실 기자
                  이형실 기자

남정호 중앙일보 컬럼리스트가 쓴 ‘김정숙 버킷리스트의 진실’이라는 책이 장안의 화제다. 이 책은 2019년 7월 문 대통령 내외의 노르웨이 방문과 2018년 11월 김정숙 여사의 대통령 전용기로 인도 방문의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실제로 순방을 가장한 외유의 실체를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국가권력의 최정점인 무소불위의 청와대가 어떤 거짓말로 어떻게 언론사와 언론인들을 괴롭혔는지 그 불의의 행태를 직접 겪은 기자의 한과 분노가 이 한 권의 책에 고스란히 담겨있다는 점이다. 

이 책의 서두는 이렇게 시작된다. 기자는 2019년 6월 ‘김정숙 여사의 버킷리스트?’라는 칼럼을 통해 외유성을 지적하고 비판했다. 이러한 일은 언론의 기본적인 기능이기에 정상적인 정부라면 모른 척 무시해도 좋았다. 겸허히 수용하면 될 일이다. 시시비비할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 정부는 ‘거짓 정보로 진실을 왜곡한 것도 모자라 막강한 권력을 이용해 언론사와 기자를 겁박했다’고 밝히고 있다. 

칼럼이 게재되자 청와대는 정정보도(사실 칼럼이나 사설은 기자의 주관적 견해를 밝힌 것이기에 정정보도 대상이 되지 않는다)를 요청했고 언론사가 무대응으로 나오자 수임료가 엄청난 것으로 알려진 일류 LKB 로펌을 붙여 언론중재위원회에 넘겼다. 이곳에서도 중재가 무산되자 자연적 법원에 제소됐고 1심에서 청와대는 완벽하게 패소했다. 

이런 상황이면 재판을 종료하는 게 맞다. 그런데도 청와대는 2심 재판을 청구했고 재판 도중 승소할 가망이 없다고 판단하자 화해조정을 신청, 언론사는 청와대가 제시한 짤막한 반론문을 실어주는 조건으로 화해가 이뤄졌다. 다윗과 골리앗에 비견되는 절대권력과 피 튀기는 공방이 끝을 맺는 순간이었다. 컬럼이 게재된 후 근 2년 만의 쾌거다. 

그러나 힘없고 나약한 언론사와 기자가 입은 정신적 육체적 폐해는 말이 아니었다. ‘이겨도 이긴 게 아니었다’고 기자는 회고했다. 그러한데도 이 기자가 이 소송을 통해 얻은 귀중한 가치, 전 국민에게 당당히 알려 줄 수 있는 그것은 ‘거짓은 진실을 이길 수 없다’라는 격언이 아닐까 싶다.

이처럼 청와대는 거짓 정보와 권력을 이용한 소송을 통해 언론에 재갈을 물리는 이른바 언론탄압을 벌였던 거다. 이게 권력기관의 ‘전략적 봉쇄소송’ 즉 ‘입막음 소송’이다. 소송비용에 구애받지 않기에 언론, 시민단체 등의 비판을 위축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횡행한다. 

이 소송은 승소를 중시하지 않는 게 특징이다. 궁극적으로 체면만 구하면 되기 때문이다. 다만 상대방에게 법적 대응과 관련한 막대한 비용을 지불케 하거나 두려움과 정신적 스트레스를 줘서 자신에 대한 비난이나 비판을 중단하도록 하는 게 목표다. 뒤가 구린, 선악 개념이 없거나 진영논리를 부추기고 공명심이 가득한 좌파성향의 기관, 특히 지자체에서 흔히 쓰는 수법 중 하나다.  

이제 앞에서 언급한 ‘입막음 소송’과 관련, 구리시장의 천박한 언론관과 시민을 가벼이 여기는 경솔한 처신에 대해 지적하고자 한다. 한마디로 청와대와 구리시는 ‘초록(草綠)은 동색(同色)’이었고 수법은 청와대보다 구리시가 한 수 위인 청출어람(靑出於藍)이었다.

지난 2019년 12월20일, 구리시장은 중요한 사실을 숨기고 시의회로부터 약 1600억원 규모의 사업 건을 승인받는다. 이러한 사실을 뒤늦게 파악한 시민단체 6명은 26일, 시청 내 기자실 앞에서 시의 행정을 규탄하는 성명서를 발표했고 기자실에 상주하던 기자 3명은 이러한 사실을 취재했다. 이어 30일 당시 자유한국당 소속 시의원 2명도 같은 장소에서 성명서를 발표하기에 이른다. 

시의 주인인 시민이, 시민의 재산을 지키는 시의원이 시청에서 성명서를 발표하는데 무슨 문제가 있을까 싶었다. 기자 또한 시민의 알 권리를 위해 취재하는 건 당연한 업무 아닌가. 그러나 문제는 다음에 벌어졌다. 시장은 성명서를 발표한 시의원 2명, 그리고 시민 6명, 이를 취재한 기자 3명 등 11명을 경찰에 형사 고발했다. 죄명은 ‘건조물 침입죄’, 즉 ‘주거침입죄’였다. 

황당한 일이었다. 시장은 말했다. ‘시의 주인은 시민이고 자신은 머슴’이라고. 이건 뭔가. 머슴이 주인을 고발한 셈이 아닌가. 시의 살림을 관장하는 시의원들에게도 시청은 남의 건물이었던 거다. 언론의 자유와 시민의 알 권리를 위해 제공된 기자실, 정당한 출입절차에 의해 30여 년간 시를 홍보해 주던 기자들을 형사범으로 몰았다. 그것도 법리도 맞지 않은 법을 적용해 언론에 재갈을 물린 엄연한 언론탄압이었다. 동병상련이라서 그럴까. 며칠 후 시장은 두 명의 시의원들에 대해 고발을 취하했다. 시민과 기자들은 그대로 놔둔 채. 

권력을 이용한 시장의 무소불위 행위는 브레이크가 없었다. 시장이 취임하기 전, 역대 시장들이 제공한 주재 기자실은 시청 6층에 있었다. 그다지 넓은 편은 아니었지만 기자회견을 열 정도의 공간이었는데 취임한 현 시장은 공보실 직원을 시켜 기자실을 비워 달라고 요청했다. 이유는 직원들의 사무실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런데 비워졌던 기자실은 시민감사관들에게 제공됐다. 쫓아내기 위한 계략이었던 것이다. 이를 무마하기 위해 시장은 2000만원의 예산을 들여 2층 로비의 모퉁이에 약 2평 남짓한 공간을 꾸미고 그곳을 기자실과 기사 송고실로 사용토록 했다. 그곳이 바로 시민과 시의원들이 성명서를 발표했던 곳이다. 

시장의 언론탄압은 절정에 이른다. 2평 남짓한 기자실 겸 기사 송고실마저도 비워줄 것을 요구했다. ‘시민에게 돌려준다’는 것이 명분이었다. 이때도 비겁하게 직원들을 시켰다. 기자들과 시민을 고발한 지 한 달 후인 2020년 1월23일, 시장은 기자실을 폐쇄했고 야멸차게 기자들을 길거리로 내쫓았다. 헌법에서 보장된 언론의 자유를 말살시킨 것이다. 

1980년 전두환 국보위의 언론 통폐합 이래 노무현 정부 때 국정 정책으로 잠시 기자실이 폐쇄된 적이 있었지만 이내 브리핑룸으로 전환됐었다. 그러나 이번처럼 한 지자체장의 독단으로 기자실을 폐쇄한 것은 풀뿌리 민주주의가 탄생한 후 전무후무한 초유의 일이었다. 입법, 사법, 행정에 이어 4부라던 언론이 알량한 전력을 등에 업고 호기로 권력을 거머쥔 망나니의 칼춤에 언론의 자유는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다. 

언론과 정부기관과의 관계는 ‘불가근 불가원’이다. 그래야 순항할 수 있다. 그렇다면 독단으로 기자실을 폐쇄하고 기자들을 길거리로 내몬 구리시장은 4년 임기를 성실히 수행했어야 맞다. 그러나 하나를 보면 열을 알 수 있듯 시민 불만의 목소리가 담장을 넘는 걸 보면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다. ‘안에서 샌 바가지가 밖에서도 새는 건 당연하다’는 게 시민의 볼멘 소리다. 

앞에서 거론된 김정숙 버킷리스트의 진실과 관련, 청와대는 언론사와 기자를 언론중재위원회에 넘길 때 수임료가 엄청난 유명로펌인 LKB를 선임했다. 구리시장도 공중파방송사를 언론중재위에 제소했을 때도 청와대와 같이 LKB를 선임했다. 언론중재위에도 수임료가 엄청난 로펌을 선임한다는 건 지자체로서 생각해 볼 일이다. 그렇다면 그 수임료는 시장이 아니면 시가... 꼭 밝혀야 될 부분이다. 이 사례는 지극히 일부분만 제시한 거다. 이처럼 구리시장의 행동은 좌충우돌이다. 

지난 6일 조선일보에 ‘자칭 민주정권의 좀스럽고 민망한 권위주의 5년’이라는 칼럼이 실렸다. 노정태 경제사회연구원 전문위원이 쓴 컬럼에서 “문재인 정권이 권위주의가 판을 치는 세상을 만들었다. 역대 정부와는 달리 이렇게 권위주의가 팽배했던 적은 없었다. 대통령이 스스로 이러다 보니 지지자들의 행태는 한층 더 저열해 졌다”고 했다. 구리시장도 그랬다. 권위주의를 앞세워 시민을, 기자를 고발하고도 기자실을 폐쇄하고도 여태껏 한마디의 사과도 없다. 헌법 제1조 2항에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했거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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